https://www.youtube.com/watch?v=8ojiJW-KIAg
"나를 만나러 와,"
그 말이 내 가슴을 스치고 간 날부터 나는 평범한 사람으로 있을 수 없었다. 달을 닮은 사람을, 색채조차 알 수 없는 흑백의 그림 속에 새겨진 이를 평생 그리워하며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시간을 보냈다. 나의 삶의 전반에 걸쳐서는 그리 마음을 빼앗는 이가 없었고, 나는 그렇게 계속 남겨져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으니까.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날부터 많은 것에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미술관에, 서적에, 소리에. 그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서, 그 흔적이 남아있는 곳을 따라 가기 위해 미친듯이 세상을 뒤졌다. 그 사람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것을 넘어, 그 목소리의 흔적으로 따라가려니 쉽지만은 않은 나날이 시작되었더랬다. 어떤 날에는 음악가인 사람을 만났다. 빗속에서 그 사람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시대와 맞지 않는 복장이라는 걸 자각하자 아무래도 내가 떠올린 시대와는 아주 빗나간 모양이다.
비를 타고 그 소리와 함께 울려퍼지는 노래를 들었다. 지나가는 이들이 모르는 언어로 떠들어대도 상관은 없었다. 이쪽을 힐끗힐끗 보더라도 아무런 문제 하나 없었다. 목표는 딱 하나였고, 이 목소리는 지독하게 익숙했으니까. 하지만, 사전이나 역사서에서 봤던 것과는 또 다른 풍경이었다.
이 목소리의 주인은 어떤 울림을 갖고 있을까? 보슬비가 내리는 날에 나는 그의 흔적을 찾아냈다. 쾌거였으나, 라디오의 주인공과는 또 다른 것 같아 마음이 초조했다. 그 언어가 아님에도 같은 목소리를 내었다. 사랑스러운 것들이 마치 공기나 비가 되어 내리는 것도 같았다. 그런데도 나는 이렇게나 초조했다. 고작 사랑하지 않는 것을 두려우한 건 아니었다. 따지고 본다면, 이 마음을 전했건만 그가 하지않은 말이면 어떡하나 같은 고민을 했다. 끼익, 큰 소리를 내며 회장의 크고붉은 문이 열렸다. 놀라지는 않았지만, 내심 지금과 같은 상태로 그를 만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곳에서의 나는 어떤 자리조차 잡지 못한 채였으니까. 과거를 바꿀 수도 있었고, 여러가지를 정정할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고작 과거를 변형하여 그의 환심을 사는 것에 그치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문이 열림과 동시에 그 얼굴을 보지 않고서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서현성이 아니라 이곳에서 지내기 좋은 이름을 얻고, 어색한 언어들을 쉽게 몸에 익히고서 번듯한 외부 출신인 것마냥 일을 시작했다. 다만, 조건을 내걸자면 그의 공연이 있는 시간대에는 일을 빼겠다고 한 것 정도. 점주는 그렇게 하라 했고, 나는 매일같이 그가 노래를 할 즈음에 그곳으로 향해 문 밖에서 몰래 귀를 기울였다. 얼굴을 아직 마주할 자신은 없었다. 시간을 넘어서 만나러 온 첫사랑일지도 모르는 이에게 쉽게 내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낮에는 사람들이 고장낸 물건들을 고쳐주는 일을 했다. 여러 사람을 만나고, 또 그 가수의 이름을 들었다. 처음 든 감상은 그것이었다. 아, 처음 온 날에도 비가 왔는데 그 사람의 이름도 비를 닮았구나. 라고. 먼 과거의 낭만은 이런 우연도 함께 불러 일으키는 모양이다. 빗물을 파도가 되어 내게 다가왔다.
그로부터 몇 개월, 드디어 이렇다 할 만한 거처가 생기고 정식으로 공연을 보러 갈 만한 좋은 폼을 갖췄다 할 수 있었다. 그다지 좋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안 했지만, 새로 맞추어 그럴싸한 폼을 내는 멋드러진 정장을 입고 직접 광이 날 정도로 닦은 구두를 신고 회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싸구려 신발을 신고서 다니던 날 동안에는 어떻게 생각할 수조차 없는 정갈한 또각이는 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듣기에는 좋았으나 어색하기 짝이 없는 소리는 걸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조차 모르도록 만들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꾸미고, 이따금은 수완이 좋은 척을 해봤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먼 시간에서 왔다고 판단되었기에 오히려 그 시절을 기준으로 말할 때마다 의식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이상은 괴짜로 여겨지는 게 평균적인 일이었으니. 이렇게 제대로된 자리를 잡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모른다.
생전 처음으로 마음이 고조되었다. 들뜬 걸음을 어떻게 해야 티가 나지 않을지 몰라 수많은 고민을 품었다. 그 결과로는 그다지 현명한 답이 나오지 않은 듯, 몇 걸음을 걷다 멈춰서길 계속해서 반복했다. 사랑이 없는 시대로부터 온 나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신기함을 느꼈다. 인류는 이렇게 살아갈 수 있었구나, 그런 낭만은 과거만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해도 나의 시대와는 완전히 다른 것들이었다. 그 사이에 이곳은 라디오의 주파수가 아직 세상을 돌지 않는 시절이라는 걸 알았고, 대신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미술이 크게 발달한 시대라는 것이다. 발달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맞기나 할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하여튼 문제는 없을 터다, 아마도.
공연장에 들어서자 바깥의 빗소리와는 완전한 단절되었다. 최적잔향시간을 고려한 듯한 내부의 디자인은 내 시대의 극장 같은 곳들보다는 아름다웠지만, 썩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순 없어 보였다. 아마 이런 객석의 수까지 그런 것을 고려한 것이겠거니, 하고 자리에 앉으면 익숙한 음이 흘러나오며 가수들이 노래를 불렀다. 주역이긴 하지만 그는 조금 더 지나야만 나올 터였다. 시간은 긴 인내였으며, 다른 이들의 목소리는 들려봤자 어떠한 감정도 안겨주지 못했다. 대망의 그 구간이 흘러나왔다. 구슬픈 음색과 맑게 울리는 목소리. 그것이 공연장을 가득 채우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모두 침묵하기 시작했다. 고요 속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이곳에서 들었던 어떤 소리보다도 명징했으며, 방울이라도 울리는 것처럼 흐릿한 감 하나 없었다. 붉고 기다란 머리카락은 이곳의 다른 사내들보다도 훨 길었고, 하나로 묶은 머리카락이 걸음마다 살며시 나풀거렸다. 아름다웠다, 무척이나.
별처럼 반짝이는 조명이나 그에 비추어져 저 자신을 뽐내는 보석보다도 그는 선명하고 아름다웠다. 눈색은 나보다도 조금 어두웠는데, 그럼에도 밝게 빛나는 것에 '이런 사람이 존재할 수 있구나' 라고 혼자 탄성을 내뱉었다. 서현성이라는 사람의 인생에 처음으로 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은 감정을 안겨주었다. 달을 닮은 그림의 탓에 그 달에 닿아 보기라도 하기 위해 투신해 보았을 때보다도 훨씬 더 많이, 더 깊은 감정이 피어올랐다. 가슴을 불태우는 사랑이 있다면, 그 불의 근원지가 있다면 눈앞에 있는 이일 것이라 확신했다. 다른 사람들은 조명이라도 꺼진 듯, 눈에 보이지 않았고 그가 무대에서 내려가면 잔상이 시야에 맺혀 떨어지질 않았다. 아니, 떨쳐내는 법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관객이 가수를 보러 갈 방법은 없었다. 공연이 막을 내려도 나는 한참 그 자리에 박힌 듯 앉아 있다가 극장의 직원이 말을 걸고서야 겨우 걸음을 뗄 수 있었다.
애석하게도 이것이 첫사랑과의 첫 대면이었다. 이후에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는 채로. 하지만, 하나 다짐할 수는 있었다. 몇 번의 삶이라도 좋으니, 이 사람을 영원히 다시 찾으러 가고 싶다고. 시간을 몇 번이나 여행해도 좋고, 몇 번이나 미아가 되고 다시 시작해도 좋고.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상실을 겪고 마음이 다친다고 하더라도 후회하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고 나 자신에게조차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불시착이라도 좋다. 정확히 그 시대로 가진 못해도, 내게는 그를 몇 번이고 다시 만나고 다시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란 걸 알 수 있었다.